어제 하루만에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다시 읽었다.
책이란 여러 번 읽어야 할 대상이 있다. 이 책이 그러하다.
읽을 때마다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생각 역시 달라진다.
나는 주인공인 로돌리코 신부보다는 '기치지로'에게 계속 눈이 간다.
언제 어디서건 그는 나타난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고, 태어날 때 부터 유약한 사람이 있노라고.
과연 나도 후미에를 밟으라고, 밟지 않으면 거꾸로 매달릴꺼라고, 한다면
밟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엔도는 신부를 팔아 넘기는 기치지로를 '유다 이스카리옷'과 대비 시킨 듯 하다.
엔도의 가롯유다를 보는 시각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그의 책 <예수의 생애>를 보면 유다 만이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형식적으로만 배교하면 됩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마음까지 돌릴 수 없다는 말일까?
우리가 '사과해!'라고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할까?
아니다.
그냥 형식상 하는 거다.
하지만 형식상이란 말이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별 가치를 두지 않지만.
후미애를 밟을 때 그 사람의 안색을 가만히 살피고
좀 이상하다 싶으면
더 강하게 요구한다.
성화에 침을 뱉고 성모는 남자들에게 몸을 맡겨 온 매음녀(창녀)라고 말하라고 시키면 거기서 다들 걸린다.
모키치는 눈에서 하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이치소우도 고통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게 인간이다.
엔도는 이야기한다. 순교란 무엇일까?
빛나고 화려한 순교를 꿈꿔왔으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비참하고 쓰라린 것이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새는 지저귀고,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고,
하루는 또 지나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주여!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바다는 이처럼 푸릅니다.
주여! 이치소우가 죽은 바다는 오늘도 여전히 단조롭기만 하고
변함없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습니다.
이 바다의 무서운 적막함 위에서 저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꼈습니다.
로돌리코 신부는 쫓기다가 웅덩이의 빗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이럴 때 인간은 갑자기 웃음을 참치 못하는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을 아는지요.
이 문구는 프랑소와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스케루>를 오마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테레즈가 마부와 눈에 마주치자 웃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 외에는 달리 이 복잡한 심정을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죠.
멀리서 닭이 울었다,는 성서적 표현도 여러 곳에서 현출됩니다.
통역과의 논쟁에서도 나오고, 성화판을 밟은 후에도 나온다.
p.143 멀리서 닭이 울었다
p.202 닭이 길게 울어 아침을 알렸다.
p.267
이렇게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 환란과 닭이 울었다는 표현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계셨더라도 그들을 위해 배교하라고 했을꺼라는 말은
엔도가 그레이엄 그린의 <사건의 핵심> 파트를 오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핵심에서 주인공인 스코비가 예수와 대화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저는 죽어야 합니다'
'아니다. 너는 살아야 한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거야.
총 9개의 란트루무로 구성된 소설이다.
첫 4개는 로돌리코 수사의 편지 형식이고,
나머지는 3인칭 시점이다.
처음과 끝에 서설과 네덜란드 상인의 일기가 있기는 하지만
크게는 9개 구성으로 보면 된다.
엔도는 이런 식의 구성을 좋아하는 듯 하다.
시점 변화가 그의 소설의 특징이다. 특히 <바다와 독약>과 대단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문구의 번역에서 소설간의 차이가 있어 적어본다.
1. 공문혜 버전
그리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2. 김윤성 버전
그리고 그분은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설혹 그분은 침묵하고 있었다 해도
나의 오늘날까지의 인생이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윤성은 직역을 한 것으로, 공문혜는 그걸 풀어서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생각하는 신과 실제 신의 다름,
강한자와 약한자
배교와 순교
그걸 바라보는 교황청과 예수회의 시각
내 고문과 타인의 고문
예수와 로돌리코 신부
가로데 이스카리옷과 기치지로
이 모든 것이 서로 대립하면서 서로 연관된다.
엔도는 이 소설은 1965년 1월부터 1년간 쓴 것으로 '후기'에 기록해 두었는데
페이지 수가 290쪽임을 감안하면
역시 서두르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저 묵묵히 써야
제대로 된 소설이 나온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 역시 <엔도 슈사쿠의 문학강의> 에서 '나는 심각한 소설은 5년에 한 편 쓴다'고 고백하고 있다. 천하의 엔도라도 대작만 쓰는 건 아니다.
그저 열심히 쓰면 된다.
그러다보면 집히는게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X'가 오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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