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실마리

표절 관련 우리의 자세는?

김욱작가 2020. 3. 17. 14:20

처음엔 그랬다.


도대체 왜 베끼는 거지?


이제는 알거 같다. 머리에서 떠오르는 게 없으니 베끼는거다.


이제 베끼고 자시고 이야기할 이유도 많이 없어졌다.

베낀 글을 올리면 이내 사람들이 알아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약간의 첨가나 가공을 하면 다른 글이 된다는 인식 때문인지

서로 베끼고 서로 인용한다.

나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대학원 전공을 저작권으로 했다.

그래서 표절에 대해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민감하다.

요즘에는 논문 한편을 써도 표절 검색 시스템에 돌려 검증을 받는다.


핵심은 '표현'이다.

내용을 차용하는 건 하등의 표절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대로 Ctrl C,V를 하거나 표현을 그대로 차용하는 건 표절이다.

이것도 출처표시만 정확히 하면 또 표절이 아니다.


<출처: 조선일보 2019.06.01.자>


문제는 누가 베낀걸 다시 베끼는 거에 있다. 이게 가장 문제다.

내공이 얕으니 누가 베낀건줄도 모르고 다시 베낀다.

이래서 인용이나 차용을 할 때는 팩트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보수계의 순정마초로 남정욱 교수의 불멸의 문장으로 갈무리한다.


실은 이거 다산 정약용에게서 배운 거다. 다산은 유배 생활 18년 동안 책을 500권 썼다. 일 년에 28권꼴인데 무협지도 아니고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다산의 책은 새로운 내용을 다루기보다 기존 책에서 정보를 뽑아 재배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읽다가 중요한 구절이 나오면 종이에 옮겨 적는 것을 초서(抄書)라고 하는데 다산은 읽는 틈틈이 이렇게 초서를 해 두었다가 관련 있는 것끼리 모아 재배치한 다음 멋진 제목을 달고 마지막으로 저자 정약용이라고 써 넣었다. 읽기와 동시에 창작이 이루어지는 다산식 다산(多産) 비법이다.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왜 남의 저서에서 요점을 뽑아내어 책을 만드는 방법을 의심하느냐" 질책하는 대목까지 나온다. 남의 것을 베끼는 것에 탁월했던 사람의 방식을 베낀 것이니 나중에 만나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베끼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읽었노라. 베껴 적은 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 해 그 열 배의 시간을 썼으며 베낀 것 중 모르는 단어를 알기 위해 또 그만큼을 썼다. 이런 경로로 베끼고 나니 그 베낀 것이 베낀 것인지 애초부터 내가 생각한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고 메모하여 책에 끼워두었다.

나중에 다시 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영업 비밀을 대대적으로 공개했으니 청탁 끊기면 어쩌나. 입 싼 놈 밥 굶기 십상이랬는데.


- 조선일보 2019.06.01.자. 남정욱 교수의 명랑소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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